상월정에 앉아

 

 

상월정에 걸터앉아 천년 담양을 생각한다. 월봉산을 품고 있는 만덕산과 국수봉은 무등산과 이어지는 호남정맥이다. 이 산마루에서 내리는 비가 서쪽이면 영산강으로 흘러 서해에 이르고, 남쪽이면 섬진강으로 흘러 남해에 이른다. 이른바 산자분수령이다.

 

슬로시티사무국에서 20분을 걸으면, 월봉산이 수채화처럼 비치는 맑고 고요한 용운저수지에 닿는다. 이곳에서 숲길을 따라 25분 더 걸으면, 가사문학면 산음에 있는 고려말 충신 전신민의 정자 독수정을 닮은 고즈넉한 공부방 상월정이 나온다. 약수터에선 시원한 물이 졸졸 흐르고, 편백나무 숲과 팔작지붕을 오가는 새소리는 청아하다.

 

상월정 마당 조릿대를 떠받치고 있는 작은 바위에 켜켜이 쌓인 이끼는 까마득한 세월을 견뎌 낸 사람들의 만만치 않았던 공부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지혜로운 지도자의 출현을 바라는 우담바라가 조릿대 사이 천년바위 어느 모퉁이에 피어 있지 않을까? 상서롭기 그지없다. 상월정에서 50분을 오르면 오목하게 파인 월봉산 정상에 이른다. 우뚝 솟은 월봉산 정상에서 완만한 무등산 능선을 바라보며, 천년을 살아왔고 천년을 살아갈 이들의 꿈, 누구나 평등한 생명평화의 세상을 꿈꾼다.

 

상월정은 본래 대자암이었다. 고려 초기 개혁군주 광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하던 해인 975년에 지어졌다. 지금으로부터 1,047년 전이다.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왕이 된 광종은 고려통일의 이념이었던 불교를 더욱 장려하고, 통일 전쟁 중 호족의 노비로 전락한 양인을 해방시키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다. 또한 고려인으로 귀화한 후주의 쌍기를 중용하여 과거제도를 도입함과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 균여의 원융회통사상을 받들어 승과제도를 체계화했다.

 

호족 중심의 나라에서 일반 양인과 삼국의 유민들 심지어 귀화인들을 중용하여 유연하고 개방된 다문화 융합국가의 초석을 다지고자 했다. 문제는 호족에게 집중된 권력이었다. 25살에 왕이 된 왕건의 넷째 아들 광종은 7년을 준비한 뒤 칼을 뽑아 들었다. 단호했다. 호족들의 거센 저항을 뚫고 피비린내 나는 개혁을 단행했다. 이 무렵 광종은 과거제도의 정착을 위하여 전국에 공부방을 짓기 시작했다. 이때 지어진 대자암은 개성에서 고속뱃길로 내려와 영산강을 거슬러 그 끝자락에 이르러야 갈 수 있는 남도 최고의 공부방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더불어 사는 고려를 꿈꾸며 공부했겠는가? 대자암에는 불교의 핵심인 불이(不二). ‘너와 나, 자연과 인간은 둘이 아니다.’는 생태인문학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여말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되고, 유교 국가를 표방한 조선이 등장하자 대자암은 쇠락을 거듭하다 결국 폐사되고 말았다. 그 후 1457년에 언양 김씨 추재공 김자수에 의해 상월정 이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다.

 

김자수는 언양 김씨 시조 김선의 18세 손이다. 김선은 신라 경순왕의 일곱째 아들로 왕건의 큰딸이자 광종의 누나인 낙랑공주와 결혼을 했다. 막강한 집안이다. 김자수는 창평 유촌리 사람으로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건개 김천일 의병장이 그의 직손이고, 충장공 김덕령의 매형 청계공 김응회 의병장이 김천일의 사촌 동생이다. 이들 역시 상월정에서 공부했을 것이다. 추재공 사후 그 후손이 황해도 관찰사였던 함평 이씨 경을 사위로 맞은 후 함평 이씨가 상월정을 관리하다가 이경이 제봉 고경명의 둘째 아들 학봉 고인후를 사위로 맞은 후부터는 창평 고씨가 관리하고 이용하였다.

 

천년이 흘렀다. 고려 개국 초기에 창건된 대자암이 조선 초기에 상월정으로 재건된 뒤 449년이 지난 1906년 조선의 국운이 완전하게 기울 때, 상월정은 근대교육의 요람 영학숙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춘강 고정주는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며 을사오적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지금 창평 슬로시티마을인 고향 삼천리로 낙향하여 민족자강론에 기초한 새로운 교육기관을 상월정에 설립하였다. 영학숙이다. 광종이 후주 사람 쌍기를 중용했듯이 춘강은 서울 사람 이표를 중용하여 외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표는 영어와 일어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수학, 역사, 지리, 체육까지 만능교사였다. 영학숙은 1년 뒤 창흥의숙으로 발전했고, 그의 둘째 아들 고광준, 사위 인촌 김성수, 담양 출신 고하 송진우, 장성 출신 김시중과 김인수, 영암 출신 현준호, 순창 출신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를 배출했다.

 

대자암의 책 읽는 소리가 끊긴 지 천년 후, 고려와 조선 두 왕조는 문을 닫았다. 나라를 잃은 춘강은 상월정에 걸터앉아 어떤 나라를 꿈꾸었을까? 그 나라는 지금 어떤 모습인가? 인류의 절멸을 예고하는 비상한 기후위기의 시대에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 상월정 마당에 서서, 다시 천년의 길을 물었다. 새로운 교육을 시작해야 한다. 호모사피엔스가 저질러 놓은 복합위기를 극복할 주체인 새로운 인류를 담양에서 길러내야 한다.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생태적 인간, 에코사피엔스”를 양성하자. 에코사피엔스가 지구를 구할지 모른다.

 

아니 구할 수 있다. 2019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은 인간을 용서할 수 있으나, 자연은 결코 인간을 용서하지 않는다.”며 지금 당장 행동에 나설 것을 절박하게 호소했다. 시간이 없다. 공립이든 사립이든 일단 담양에서 첫걸음을 떼자. 그리고 ‘그 사람. 에코사피엔스’를 배출할 “슬로인생학교”를 시작하자. 생태인문학의 도시 슬로시티 담양은 이미 준비된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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