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투데이 이철웅 칼럼] 투표의 패러독스

 

 


투표는 국민이 주권을 발휘하는 가장 기본적이며 주요한 수단 중 하나로서 국민이 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정치 참여 방식이며 정치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행위라고 정의된다. 민주사회에서는 투표가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핵심적인 수단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항상 최선의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장자크 루소는 그의 저서사회계약론에서 국민은 선거일 하루만 나라의 주인이고, 선거가 끝나는 날, 노예로 전락한다.”고 했다. 선거 후에 국민은 관객으로 전락해버린다는 관객민주주의, 선거가 끝나면 대의기관의 통치의 객체로 전락해버린다는 시간제 민주주의라는 비아냥거림이 이해되는 말이다. 민주주의를 신봉했던 그가 민주주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선거가 정치적 소양이 부족한 시민들에 의한 잘못된 선거로 민주주의의 가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해 투표를 잘해야 한다는 경고의 메시지로 이런 말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민주주의 초기 시대에는 차등선거가 있었다. 돈이 있고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 시민에게는 여러 개의 투표권을 주고 재산이 없고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시민에게는 한 개의 투표권만을 주어 사회적 신분에 따라 투표가치에 차별을 두었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웃기는 일이지만 그 시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정치적 소양을 가진 시민들은 선거 때 돈에 매수되지 않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후보를 선택하는 현명한 판단을 했다. 사회의 지도층을 자칭하는 이들에게 선거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정치적 행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일반시민들은 돈에 매수되었고, 누구를 선택해야 내게 이익이 되는지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향응과 금전에 매수된 투표로 민주주의의 고귀한 가치인 선거제도가 훼손될 위험성이 우려돼, 이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차등선거를 실시했다. ‘정보의 부익부빈익빈이라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일반서민층은 정보의 부재로 후보의 선악을 가려 투표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유권자에게 동등하게 11표의 투표권을 인정한 평등선거는 개인마다의 능력이나 정치의식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 개인의 정치의사를 1표로 환원시킨다. 따라서 정치의식을 가지고 행사한 1표와 매수된(향응과 금품제공)표를 같은 가치로 취급하는 모순이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민주적 투표과정을 거쳤다고 해서 최고의 인물이 뽑힌다는 보장은 없다는 다른 얘기다. 그럼에도 투표는 여전히 최선의 민주주의 절차로 간주된다. 민주주의 완성으로서 선거가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아직까지 선거보다 더 나은 대안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4.15총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각 정당들의 국회의원 후보가 속속 확정되면서 후보자들의 표심을 향한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조금 있으면 내일의 대한민국을 이끌어가겠다는 후보들의 말이 무성하고 그들의 외쳐대는 꿈의 청사진과 상대방 깎아 내리기는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유권자들을 어지럼증 환자로 만들 것이다. 우리는 선거 때마다 허황된 공약과 상대방 헐뜯기에도 신물이 나고 귀가 멍멍해지지만 그래도 그 어디엔가는 우리의 소망을 풀어줄 길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415일 우리는 차선일망정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 기왕에 하는 투표, 루소의 말을 다시 소환하지 않더라도 후보선택에 심중에 심중을 기해야 한다. 몇 가지를 주문해본다.

선출직 후보를 선택할 때는 공약보다는 특정후보가 뭘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눈여겨 봐야한다. 예를 들어서 변호사 출신이나 민주화 운동 이력의 후보자라면 그들이 변호사로서 민주화 투쟁가로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이들이 자기 자신을 위한 활동에 주안점을 뒀는지 타인을 위한 다른 활동에 방점을 찍었는지를 보고 웬만한 차이가 아니라면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

공약이라 하는 것은 선택받기 위한 수단으로 하늘의 별도 따다 줄 것처럼 말의 성찬이 봇물을 이룬다. 그러나 살아온 삶은 못 바꾼다. 아무리 화려한 메이크업으로 치장을 해도 어느 정도는 알아 볼 수가 있다. 이번 총선에서 국회의원을 선택할 때는 공약, 학력, 경력, 이력 등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가치를 갖고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선택의 주안점이 돼야 한다. 또 하나 선택하지 말아야할 후보가 있다.

유시민은 모 방송에서 찍지 말아야할 후보유형 두 가지를 말한바 있다. 첫 번째는 연민의 정이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고 했다. 동시대인들의 삶의 양상, 사건 이런 것 등에 대해서 측은지심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내가 아닌 타인이 당한 불행한 일들에 대해 연민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선출직 공직자로서 부적합하다고 했다. 두 번째는 앞뒤가 안 맞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예를 들면 누굴 바보로 아나이런 생각들 들게 하는 사람은 뽑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 사람은 올바른 사람일수도 없고, 똑똑한 사람일수도 없고, 공정한 사람이긴 더욱 어렵다고 했다. 개개인의 정치 지향점에 따라 유시민의 말에 호불호가 있겠지만 선택하지 말아야 할 정치인 사례로서 동감이 간다.

대의민주주의에서 국민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국가로 전달하는 방법은 투표 밖에 없다. 정치를 혐오해 투표 안 하면 더 바뀌는 게 없다. 최선의 후보가 없으면 차악의 후보라도 선택해야 한다.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국민을 말한다. 입에 발린 소리다. 솔직히 정치인들은 국민에 별 관심 없다. 그들은 오직 투표하는 유권자만을 두려워한다. 우리들의 목소리를 듣게 만들려면 투표해야 한다.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이번 총선에도 재연될 지역구도 망령이다. 통계적으로 보면 투표하는 유권자 중 3분의 2는 정당을 보고 투표한다고 한다. 보수정당에서 세종대왕이 나와도 안 찍는다는 모 진보인사의 말처럼(보수도 그렇겠지만) 70%에 가까운 사람들이 후보자의 선악과 관계없이 출신정당을 보고 투표하는 경향이다. 특정지역에서 특정정당의 막대기만 꼽아도 당선되는 망국적 현상이다. 바꿔야 한다. 후보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막스 베버는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인에게 필요한 세 가지 덕목으로 정열과 책임감, 목측능력(目測能力)을 꼽았다. 대의명분에 헌신할 정열과 자기 행위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질 않을 책임감, 내적인 집중력과 평정심을 갖고 사물과 인간에 대해 균형 감각을 두는 목측능력이 정치가에게 필요하다고 했다.

막스 베버가 100년 전 어떤 강연에서 한 말이지만 다가오는 4.15총선에서 우리가 이런 후보를 뽑는다면 후보선택에 절반의 성공은 이루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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