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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봉오동 전투와 홍범도"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이 일제에 의해 해산되고 그 군인들의 참여로 의병 연합체인 13도 창의군 결성이 됩니다. 그 군세가 사못 전성을 맞이하여 이들은 서울진공작전까지 세우고 각국 영사관에 의병을 교전단체로 인정해주라는 공문까지 보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총대장인 이인영이 모친상을 당해 낙향해 버리고 게다가 양반의병장과 평민의병장 갈등, 열악한 무기 등으로 서울진공작전은 서울 인근까지 가서 유야무야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당시 대외적 상황이나 의병들 군세로서는 서울진격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일본군을 어떻게 해 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서울진격작전은 나라가 망해가는 순간에 우리 역사적 자존심을 지켜줄 수 있는 상징적인 사건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서울진격작전이 서울 진입 시도도 못하고 실패하니 아쉽기 그지 없습니다. 또 그 이유들이 기가막히기도 합니다. 이인영 총대장 모친상으로 낙행한 이유가 가장 큰 이유로 알려져 있지만 진짜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평민의병장 출신 신돌석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의병들도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힘을 합치고자 "13도 창의군"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양반출신 유생의병장들이 평민출신 의병장이었던 신돌석과 홍범도와 함께 할 수 없다며 무시하고 13도 창의군에서 쫓아내기까지 합니다. 그런 갈등이 서울진격작전 무산에 가장 큰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당시 양반출신 의병장들은 나라에 대해서는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나라를 찾는 일에서 까지 신분을 따지는 성리학적 한계는 벗어나지 못 했습니다. 전쟁 중에 모친상 당했다고 총대장이 낙향해버리는 모습도 그랬구요.

 



사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신분차별은 아니지만 이념에 따라 같은 독립운동을 한 분들을 차별 대우하고 있습니다.

작년 현충일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김원봉 독립투사로서 강조한 연설이 갈등의 불씨가 되어 정치권은 공방을 벌였습니다.

당시 독립운동 하신 분들이 현 이런 상황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일제 강점기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습니다.
좌우익으로 나누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좌우익은 현재 남북으로 갈라진 좌우익과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 민족 구성원에게 남북 항일 독립운동가는 한 집안이나 특정 지역이 독점해서는 안 됩니다. 독립운동가는 민족공동체가 함께 기리고 본받아야 합니다.

이제는 지금 상황에서 좌우익으로 나누어서 당시 독립운동가들을 보지말고 사상이나 이념을 떠나 당시 그 분들 독립운동 활동만 오롯이 보았음 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에서 당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였던 김원봉, 김두봉, 양세봉, 심지어 김일성 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평가는 지나치게 인색한 것이 사실입니다.

김일성은 우리 학창시절 김성주라는 사람이 가짜로 독립투사 김일성 역할을 했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일제강점기 때 그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 주석이 맞다고는 인정합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독립군으로서 활동을 엄청나게 과장은 하고 있기는 합니다.

아마 이렇게 쓴 글만 봐도 강하게 반발하며 나를 거의 빨갱이로 모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입니다.

옛날 같았으면 간첩으로 몰렸을 수도 있었겠지요.

이래서 현대로 들어 갈수록 역사 글 쓰기가 점 점 더 어려워 집니다.^^

사실, 평민의병장 출신 홍범도 장군도 최근에 와서야 부각되고 있습니다. 안동김씨 세도가 양반출신 김좌진 장군에 비하면 너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래 왔습니다.

그럼 먼저 홍범도와 봉오동전투에 대해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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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호랑이를 잡는 포수 출신이다.

홍범도가 의병장으로 나세게 된 역사적 배경은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 되자 군인들이 무기를 가지고 의병에 합류하게 되는데 이때 일본 제국주의는 군대를 해산 시킨 것만이 아니라 산에서 들짐승을 잡고 생계를 유지하고 있던 포수들 무기까지 몰수했다.

 




포수들은 이에 분개하고 나라 잃은 슬픔에 더해서 생계까지 막막했던 홍범도가 중심이 되어 전국 포수들을 의병으로 이끌게 된다. 당연히 의병장은 홍범도가 맡게 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홍범도 의병은 1907년 "13도 창의군"에 참여했지만 양반출신 의병장들이 평민출신 의병장이었던 신돌석, 홍범도와 함께 할 수 없다며 무시하고 13도 창의군에서 쫓아 냈다.

홍범도는 크게 실망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두만강 건너 북간도 지방에서 대한독립군을 조직한다. 홍범도는 1919년 3.1 독립운동이 국내에서 벌어지자 해외에서 힘을 길러 무장 독립군으로 국내에 진입하면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홍범도는 생각으로 끝내지 않고 실제로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입한 후 일제 경찰서를 습격하는 게릴라전을 펼쳤다.

일본군은 이린 홍범도 부대를 잡기위해 작전을 벌이다 홍범도의 유인책에 걸려 "삼둔자"라는 지역에서 일본군 전초부대들은 다수 사망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전투 서막이 "봉오동 전투" 이다.

독립군 게릴라 전에 당한 복수를 위해 추격대를 조직한 일본군들이 두만강을 건너 홍범도 독립군 군대를 추격했던 것이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군이 힘을 합쳐 봉오동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 160여 명을 사살한다.

여기서 봉오동이란 지명은 마을 이름이 아니고 깊은 계곡을 말한다. 깊고 깊은 계곡으로 일본군을 유인하여 섬멸한 전투였다.

봉오동 전투는 우리나라 무장독립투쟁 최초의 승리였다고 역사는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일제는 봉오동전투에서 당한 복수를 다짐하고 2개 사단 병력을 투입해서 간도지역에 있었던 홍범도의 부대를 포위하게 된다.

이때 홍범도의 부대 근처에는 당시 김좌진이 "북로군정서"라는 부대를 이끌고 있었어 홍범도와 김좌진은 전략적으로 백두산 쪽으로 부대를 이동시키면서 청산리 지역에서 약 10여 차례 크고 작은 전투를 통해서 일본군 약 1천2백여 명을 사살하는 전투를 벌인다.

바로 이 전투를 우리가 청산리 대첩이라 부른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는 따로있지 않고 이처럼 이어져 있다.

청산리 전투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김좌진 장군 전공으로만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것 만이 아니었다. 청산리 전투와 김좌진 장군은 다음 편에 자세히 다루겠다.

독립군들이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만주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게릴라 전투였다는 점과 군대의 조직이 점조직으로 운영되어 군사 기밀을 잘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청산리전투에 비해 덜 알려진 봉오동전투는 바로 얼마전 영화화 되어 우리에게 좀 더 친밀하게 다가왔다.

영화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첫 대규모 승리를 쟁취한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를 처음으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원신연 감독은 한 명의 영웅이 아닌 모두가 함께 일궈낸 첫 승리의 역사, 봉오동 전투에 단번에 매료되어서 영화화 했다고 전했다. 

영화 내용대로 봉오동전투는 홍범도 장군 혼자만의 전투가 아니었다. 청산리 전투도 김좌진 장군만의 작품이 아니었다.

이처럼 봉오동, 청산리 전투는 임진왜란 의병들처럼 이름없는 들풀들이 이루어 낸 쾌거였던 것이다.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최진동 부대가 일본군 정규군을 대패시켜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킨,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전과 중 하나이다.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 이후 주로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했고, 말년은 중앙아시아 북부에 위치한 카자흐스탄에서 보내다가 그 곳에서 7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아랫 글을 쓸까 말까 망설이다 그래도 역사는 객관적 진실을 알아야 함으로 이런 기록도 있다는 것을 밝힌다. 청산리 전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측은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이 삼둔자에서 일본군 60명을, 후안산과 고려령 전투에서 120명을, 봉오동 상촌전투에서 157명을 사살하고, 200여명을 부상자를 냈다고 주장한다.

위와 같은 전과는 일본 사료를 교차검증하지 않고, 우리측 사료인 독립신문과 임정 군무부의 자료를 맹신하여 그대로 옮겨쓴 오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당시 일본군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가 작성한 『봉오동전투상보』에 따르면, 2등졸 호리이 시게쿠니(堀井茂邦)가 흉부 관통상으로 사망하고, 1등졸 가지우라 간지로(梶浦甚次郎)외 경찰관 2명이 부상당한 것 외에 일본군의 손실은 없는 것으로 나온다.

이 기록을 일본측 자료라 못 믿겠다느니, 일본측에서 축소보고 했다고 치부하기도 하지만 이 전투상보를 보면 일본군 추격대는 남양수비대 27명, 증파된 월강추격대 243명 해서 대략 270명정도의 규모로 나온다

그런데 우리 측이 주장하는 60 + 120 + 157명을 사살하고, 200명을 부상시켰다면 출동 군인들 보다 더 많다.

1920년6월 20일 오사카 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에 실린 조선군사령부의 특전에 따르면 "정보에 의하면 그들은 교전 당시 사망한 독립군 일당의 사체를 쌓아놓고 이를 (일본군의 사체인 것처럼) 사진으로 찍어 상해 가정부로 보냈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우리 측 주장을 과장으로 보는 측은 최초로 봉오동 전투의 승리를 전한 1920년 6월 22일자 상해 독립신문에 따르면 적병 사상자 12명, 아군은 미상하나 시체 24구 발생이라는 보도가 나간 뒤, 임정 군무부의 통신을 받고, 갑자기 120명 섬멸로 바뀌더니, 2일 뒤에는 적의 사망자 60명, 부상 50명으로, 또다른 간도국민회의 호의에서는 150명 섬멸로 둔갑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본측 봉오동전투상보와, 경부 와쿠이(和久井)가 조사한 『복명서』, 조선군사령관이 육군성앞으로 보낸 전보(朝特35) 등 여러 자료에 일관적으로 사망자는 병졸 1명으로 되어 있다.

또한 문제가 되는 것은 홍범도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 되었다는 것이다. 봉오동 일대는 사실 간도에서 군무도독부를 조직한 최진동의 지역이었고, 그 지리나 형세, 주민분포까지 최진동의 손아귀에 있던 곳이다. 자료마다 상이하기는 하지만, 봉오동 전투의 연합작전에서 최진동이 사령관이고, 홍범도는 편장이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홍범도가 작전지도를 펼치고 이래라 저래라 지휘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리고 사격명령까지 내리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거 다 최진동이 한 것이다는 주장이다. (상해 독립신문 1920년 12월 22일-최진동 사령관의 사격명령에 의하야...)

그런데 최진동은 왜 주목받지 못하고 홍범도가 이 모든 것을 다한 것처럼 역사에는 기록되고 있는 것일까?

최진동은 중일전쟁 이후 변절하여 친일부역한 사람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의 역할은 축소하고, 대신에 신출귀몰 명장으로 조작된 홍범도를 앞세운 것일거라는 추측도 있다. (실제 1945년 12월 『한국광복군약사』에서 최진동은 봉오동 전투 지휘관 명단에서 사라진다)

진실은 나도 모르겠다. 기록이 이렇게 다르니 말이다.

그러나 봉오동 전투가 일본군 사상자 수나 홍범도 역할이 조금 과장 될 수는 있다. 그러한 것은 세계사적으로 어느 전투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봉오동전투가 홍범도 한 사람의 영웅적 역할에 있는 것이 아닌 이름없는 들풀들이 이루어 낸 쾌거라고 했다.

사상자 수의 진실은 아마 독립군, 일본군 둘 다 확대 축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너무 차이가 날 것이다.

가장 진실에 가까운 연구보고서는 박창욱(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연구) 보고서로 알려져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일본군은 "독립군을 20여명을 죽이고 아군(일본군)은 1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간도' 국자가에 있는 일본 영사분관에 소속된 와구의 경부가 이 사건을 조사했는데, 결과는 약간 달랐다. 와구의 경부가 조사한 '복명서'에 따르면 "아군(일본군)의 전사 병졸 1명, 부상 5명. 7명 또는 10여명이라고 하는 자도 있다"고 한다.

6월 22일 상하이 '독립신문'에 따르면 "적 사상병 12명. 아군의 손해는 미상하나 시체 24, 그 외에도 상당한 사상자가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이것을 교차 검증하면 일본군은 사상자 10명 안팎 정도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사상자도 독립군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일본군끼리 서로 오인사격으로 발생한 사상자라는 것이다.

박창욱(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연구) 한국사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봉오동 전투의 진실은, 일본군 약 260 여명이 독립군을 추격해 쫒아왔고 독립군은 봉오동 부근에서 잠복해 있다 일본군이 들어 오자 사격을 가했고 전투가 벌어 졌다. 그러나 그 전투는 번개와 엄청난 우박이 쏟아져 곧 끝났고 독립군은 재빠르게 다시 사라졌다. 이를 다시 쫒던 일본군은 서로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사격을 했고 이때 사상자가 10여명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일제가 죽였다고 주장하는 "20여명", 그리고 독립신문에 나온 "시체 24"는 무엇일까?

그 인원의 대다수는 민간인 사망자였다. 당시 항일군들은 전투를 벌인 뒤에 마을을 정리했는데 마을에서는 "남동의 남녀노소 24명의 시체를 처리하고 부상자 2명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이 무차별 사격을 하며 죽인 민간인들이다. 또한 서육린은 "무릇 한민들 촌이면 집집마다 수색하고 사격하여 한민 남녀 17명을 살해하였다."는 증언을 했다. 일본군이 죽였다는 전과의 대부분은 무고한 민간인들이다

추격대는 일본군은 독립군을 잡지도 못하고 엉뚱하게 민간인만 학살하다가 10명 안 팎이 다치거나 죽는 뻘짓을 한 것이다.

이 연구서는 우리 측 인사인 박창욱씨가 철저하게 현장을 조사하고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생존다들을 인터뷰해서 쓴 것이다. 어쩜 사실과 가장 부합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고 영화로 본 봉오동전투와는 많이 달라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독립군이 최초로 대대급 일본 정규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3.1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의기소침해진 국내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사기를 북돋으고 희망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 만큼은 확실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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