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3.1운동하면 나라를 위해 헌신한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생각나는 날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1908년 고흥에서 태어나고 자란 '월파 서민호' 선생에 대해서는 잘 알지못하고 알려진 바가 별로 없어 안타까운 마음에 장문의 글을 올린다.
3.1운동의 시초는 2월 28일 동경시내에서 조선인 학생 11명이 모여 일본의 심장격인 동경에서 독립선언서를 외친 것이
3.1운동의 발단이다.
11명의 학생 중 한명이 바로 '월파'다.
그 후 이 영향을 받은 민족지도자들이
3.1일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만세를 외쳤고 한달 후 천안 아우네 장터에서
'유관순 열사(고흥 유씨 후손. 우리나라에 호두나무를 가져오고 현 고흥이라는 지명을 하사받은 풍양면 한동에 살았던'유청신''공의 후손이다) 께서 독립만세운동을 펼치다 옥고를 당하셨다.
월파는 그 후로도 일제강점기의 서슬퍼런 칼날 앞에서도 당당히
우리 민족의 얼을 살리려는 조선어학회를 후원하시다 옥고를 치루기도 하셨고 일제 말기에는 벌교에서 서민들의 배움터인 '송명학교(지금 벌교 성당자리)'를 설립하였으며 도지사 시절에는
민족사관학교인 '조선대학교'설립을 주도하시기도 했다.
광복후 이승만 정권이 1.4 후퇴 때
우리 군인들에게 지급해야 할 예산을 군간부들이 횡령하여 우리군인 약 5만명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고 영양실조에 걸린 '국민방위군 사건'과
국군이 빨갱이를 색출한다면서 무고한 거창군민 약 570명을 집단 사살한 '거창 양민학살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한점 거짓없이 국민에게 알리는 첨병 역할을 하셨다.
그는 통일문제에도 범민족적 시각으로 문제해결을 제시한 통큰 정치인기도 했다.
월파가 내세운 '남북한 서신교환과 남북교류 주장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통일방안의 시금석이 되고있다.
지금도 고흥군 동강면에는
'월파'의 선대 묘역과 그가 태어난
'죽선재'가 남아 있다.
우리가 그를 기려야 하는 것은
자신을 희생한 시대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우리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다음백과에서 나오는 '월파'에 대한 자료를 함께 올려본다.
-서민호-
호는 월파(月坡). 제2대 국회에 진출하여 1951년 1월 발생한 '국민방위군사건'을 폭로했고 1952년 소위 '서민호 의원 사건'의 당사자로서 반(反)이승만 성향의 비판적인 정치인이었다. 일제강점기에도 3·1운동 및 조선어학회사건과 관련해 옥고를 치렀다. 1922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과 1926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수학했고, 8·15해방 직후 남선무역회사 사장을 지냈으며, 이어 광주시장과 전남지사를 역임했다.
국회의 부산 피난시절 이승만 정권 관련 군인들의 온갖 압력과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고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을 과감히 국민에게 폭로함으로써 조사하도록 했다. 1952년 국회 내무위원장으로 지방 시찰중 전라남도 순천에서 권총을 발사하며 위협한 서창선 육군대위를 호신용 권총으로 사살한, 소위 '서민호 의원 사건'으로 국회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에 의해 8년간의 실형을 살다가 4·19혁명 후 과도정부의 특별사면으로 출옥했다.이후 민주사회주의를 이념으로 표방하며, 1967년 3월에 창당된 대중당의 최고위원으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으나 다시 반공법위반으로 옥살이를 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었다. 국회의원으로서 정부의 실책을 국민에게 폭로하고 국회내 비판자로서의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강직한 성품의 정치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