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과잉의 시대, 미술관에 가보면 어떨까요?

일상이 나 자신의 얄팍한 버전이 되지 않기 위한 투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첫 번째 주범은 바로 기술이다. 기술 때문에 주의 집중 시간이 자꾸 줄어들고, 집중력을 떨어트리는 유혹이 일상에 가득해졌다. 두 번째는 모든 것의 정치화다. 많은 사람처럼 나도 하루 중 너무 많은 시간을 정치, 그러니까 뻔한 당파적 분노, 경마 관전 같은 선거 분석, 트럼프 발 오늘의 스캔들 따위에 몰입한 채 보낸다.


그래서 내가 세운 비책이 하나 있다. 바로 예술로의 도피다.


누구나 어릴 때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모험담에 푹 빠져서 밥을 먹을 때도 손에서 책을 내려놓지 않았던 일, 어떤 음악이 너무 좋아서 온몸이 터질 것 같았던 기분,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을 만나서 그대로 그림 속 평행우주로 걸어 들어가고 싶었던 느낌.


이런 경험을 우리는 흔히 책이나 노래에 푹 빠져서 넋을 놓았다고 표현한다.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존재를 잊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예술이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자의식 강한 자아의 입을 닫게 했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예술 작품이 우리 정신의 보다 깊숙한 영역, 사람의 감정과 도덕적인 감수성이 깃든 잠재의식의 왕국, 인간이 잔혹함 앞에서 역겨움을 느끼고 관대함의 존재에 감탄하게 만드는 즉각적이고 미학적인 반응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가는 문을 열어줬다는 의미에서다.


예술은 우리 안의 심오한 차원, 정말로 중요한 차원에서 작동한다. 모든 사안에서 나와는 의견이 다르더라도 마음이 선한 사람, 그러니까 타인과 공감할 줄 알고 타인의 걱정과 갈망, 소망에 이입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와 하루 종일 함께할 자신이 있다. 반면 모든 문제에서 나와 의견이 똑같더라도 차갑고 성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과는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다.


예술가들이 처음부터 사람들을 개선하려고 작품활동에 나서는 경우는 잘 없다. 이들은 그저 자신이 경험한 것을 완벽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예술은 보는 이를 인간답게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첫째, 아름다움은 어떤 식으로든 주의를 끌게 된다. 아름다움에 자극받으면 우리는 세상 모든 것에 의견을 내고자 하는 자기중심적인 경향을 떨쳐버리게 된다. 내가 가던 길을 멈춰 서서 심호흡을 하고, 나에게 주어진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어린아이 같은 경외심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이 된다. 예술은 우리가 인내심, 정의감, 겸허함을 갖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훈련한다. 소설가이자 철학자였던 아이리스 머독은 저서 “선의 지배(The Sovereignty of Good)”에서 “덕이란 이기적인 의식의 베일을 뚫고 나가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함께하려는 시도”라고 썼다.


둘째, 예술작품은 감정의 폭을 확장시킨다. 시를 읽거나 조각품을 본다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경험이다. 영국의 철학자 로저 스크루턴은 다음과 같이 썼다.


“모차르트의 주피터 교향곡이 듣는 사람 앞에 펼쳐지는 것은 즐거움과 창의력의 홍수다. 프루스트를 읽는 사람은 마법 같은 어린 시절의 세상으로 이끌려, 어른이 되어 찾아오는 삶의 비탄이 어린 시절의 즐거움에 내재해 있다는 묘한 예언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일종의 감정적인 지식을 갖추게 된다. 어떻게 하면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지, 타인의 슬픔, 아이가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에는 어떻게 공감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는 뜻이다.


셋째, 예술은 다른 이의 눈, 대체로 나보다 세상을 더 깊이 있게 보는 사람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알려준다. 피카소의 “게르니카(Guernica)”는 분명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담은 정치적인 작품이지만, 다큐멘터리처럼 전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한층 더 깊은 차원에서 순도 높은 공포, 고난이라는 보편적인 경험, 이를 촉발한 인간의 폭력성이라는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랠프 앨리슨의 소설 “보이지 않는 인간(Invisible Man)”은 인종적 불의를 다룬 정치적인 소설이지만, 작가는 출간 후 단순히 인종적인 저항에 대한 소설을 쓰려한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소설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듯이, 인간성에 대한 극적인 비교 연구를 시도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토록 정치적이고 기술 지배적인 시대에 나는 두려운 마음을 끌어안고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향한다. 그 두려움이란 예술이 공공의 삶에서 주변부로 밀려났으며, 사람들이 소설이나 중대한 예술적 업적에 대해 더 이상 토론하지 않고, 미술계나 문학계 자체도 배타적인 집단 사고로 망가져 버린 것이 아닌지, 그래서 문화의 비인간화로 이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반란은 여전히 가능하다. 가끔은 정치 중독을 잠시 내려놓고, 마음의 자유로운 유희와 얽매이지 않은 정신, 최고의 예술이 여전히 제공하는 고양된 의식 상태를 즐겨보자. 올 초 나는 휘트니 미술관의 에드워드 호퍼 전을 몇 차례 관람했다. 이후 골목 안 빈 공간과 그 안에서 고립된 사람들이라는, 호퍼의 눈으로 본 뉴욕이라는 도시를 볼 수 있게 됐다. 열심히 읽어 내려간 작품설명은 아마 대부분 잊어버리겠지만, 작품의 이미지는 내 마음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원문 : The Power of Art in a Political Age.By David Brooks
조은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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