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오백년!
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114
동학혁명 3 - 일촉즉발
*******************
동학혁명?
어떤 분은 댓 글로 '동학농민운동'이 맞는 표현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역사 교과서에서 동학농민운동이라고 배워 왔습니다. 현재에도 역사 교과서에는 분명 "동학농민운동"으로 학생들은 배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 많은 분들은 '동학혁명'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공주 우금치 위령탑 탑 비문에도 분명 동학혁명이라고 나옵니다.
동학혁명이란 말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부터 사용하게 됩니다. 공주 우금치 전적비 위령탑에 1973년 대통령 박정희라는 익숙한 단어를 볼 수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동학농민운동을 동학혁명이라고 사용했다니 조금 아이러니 하죠?^^
아마 5.16 군사쿠데타를 군사혁명으로 부르기위해 동학농민운동을 동학혁명으로 바꿔 부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어떤 표현이 정확할까요?
또한 운동과 혁명의 차이는 무엇이며, 혁명이란 무엇일까요?
혁명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하자면
어떠한 사회적 현상이 '혁명'으로 개념화되기 위해서는, 1) 폭력이 있어야 하며, 2) 대중적인 참여가 있어야 하며, 3) government body의 변화가 있어야 하며, 4) 정치적 구조의 변화가 있어야 하며, 5) 계층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즉, 혁명은 구조적이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는 대중의 폭력적 행위를 말합니다.
프랑스대혁명, 러시아혁명등은 위 조건을 다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학의 경우 참여가 대중적이긴 했지만,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혹은 계층적인 구조변화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정권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광주민주화운동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학술적 의미로 봐서는 동학혁명. 광주혁명이라는 말 보다는 동학농민운동, 광주민주화 운동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 둘이 혁명이 되기 위해서는 미완성이었지만 우리 마음 속에는 혁명으로 남아 있기를 원하고 혁명으로 부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저도 동학혁명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대마다 동학운동의 명칭이 조금씩 달라져 왔습니다. 동비의란, 농학농민운동, 동학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 동학농민혁명 이렇게 명칭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것은 분명 그 시대 정치적 영향이 있다고 봅니다.
역사는 시대마다 달리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동학혁명 3 - 일촉즉발
1860(철종 11)년에 최제우가 제세구민의 뜻을 가지고 창건한 민족 종교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했다. 포교를 시작하자마자 곧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동학은 최제우가 포교에 전념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 되었다. 이에 조정은 긴장하여 1862년 9월 사술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최제우를 경주에서 체포한다. 그러나 수백 명의 동학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방면되었다.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동학의 정당성을 관이 입증한 것으로 받아 들여져 신도가 더욱 증가하게 된다.
신도가 늘게 되자 그 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가 관내의 신도를 다스리는 접주제를 만든다.
이후 경상도·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교세가 확대되어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3개 소를 확보하였다.
이 해 7월 제자 최시형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해월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최제우 자신이 관의 지목을 받고 있음을 알고 미리 후계자를 정한 것이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미 동학의 교세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최제우 체포 계책을 다시 세우고 있었다. 그해 11월 20일 선전관 정운구에 의하여 제자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 되었다.
최제우가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 10일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교주의 죽음에도 동학의 교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도통을 이어받은 2대 교주 최시형의 공이 컸다. 최시형은 흩어진 조직을 모으고 정비 확대해 갔다. 그리고 최제우가 지은 글들을 모아 '용담유사, 동경대전'을 간행해 교리를 가다듬었다.
서양세력의 부상에 불안하고 탐관오리의 횡포에 절망하던 백성들은 이런 동학에서 의지할 곳을 찾았다.
충청, 전라 지역으로 확대된 동학, 교세를 자각한 지도자들은 교주 최시형에게 교조신원운동
( 교조 최제우가 혹세무민의 죄명으로 처형당한 뒤, 동학교도들이 그의 죄명을 벗기고 교조의 원을 풀어 줌으로써 종교상의 자유를 얻기 위해 벌인 운동 )을 요구하고 나섰다.
최시형의 승낙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고종 29년 신도 1,000여 명이 공주에 모여 집회를 가졌다. 지도부는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이에 조병식은 각 고을에 공문을 내려보내 요구의 일부를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고무된 동학 쪽은 며칠 후 감례에서 더 큰 집회를 가졌다. 전라 감사의 반응도 조병식과 다르지 않았다.
고종 30년 40명의 대표가 상소문을 들고 서울로 올라와 궐문 앞에 엎드렸다. 하지만 지방에서와 달리 상소에 대한 조정의 반응은 싸늘했다.
아마 조정은 싸늘했다기보다는 긴장했을 것이다.
동학은 조정의 반응에 아랑곳 하지않고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포교를 넓혀 갔다.
그리고 전라도 고부에서 사건이 터졌다.
동학혁명은 조선 고종 31년(1894)에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전라도 고부에서 부터 시작된 혁명이다.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는 단지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그러나 2차 봉기부터는 존왕양이(尊王攘夷), 반외세, '척왜양(斥倭洋)' 즉 왕실을 높이고 일본과 서양 오랑캐를 몰아낸다는 뜻으로 동학군의 구호가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2차 봉기는 농민들의 고통이 탐관오리들의 횡포도 있었지만 일본 및 서양 세력의 경제적침탈 때문이라고도 판단했기 때문이다.
농민군은 2차 봉기부터는 이미 판이 전국적으로 크게 벌어진 상황에서 부패한 지방관만을 몰아 내자던 1차봉기 민란의 범위를 뛰어 넘어야 했다. 전국적인 차원에서 계층과 신분을 뛰어 넘는 다양한 세력의 결집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구호가 필요했다.
교조신원운동의 묵살,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불법 착취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한 불만이 도화선이 된 혁명이었지만 이제 대외적인 척왜양으로 번져 갔다.
동학혁명은 조선 봉건사회의 억압적인 구조에 대한 농민운동으로 확대되어 전라도·충청도 일대의 농민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고종과 명성황후 측이 스스로 막아낼 수 없다 판단하고 청에게 구원병을 요청해 청·일 양군의 조선 진주와 더불어 실패했다.
또 동학혁명은 청·일전쟁을 발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난 이 지점에서 의문을 느낀다.
이 전쟁을 계기로 청나라도 개혁이 중단되고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
청은 자국사정도 만만치 않은 상황인데 왜 또 명성황후 측의 세 번째 구원요청을 받아 들였을까?
청이 갑신정변 때 일본과 맺은 텐진조약에 따라 일본도 곧 바로 조선에 파병을 할 것이고 청일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을 거라는 것을 몰랐을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조정의 요구에 따라 세 번째 청군을 파병한 이유가 궁금하다.
아마 당시로서는 청이 일본을 우습게 보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청 관료들도 대외정책을 보는 안목이 부족했고 썩을대로 썪어 있었다.
만약 청이 당시 자국상황과 텐진조약을 핑계로 조선에 파병을 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도 파병이 없었을 것이고 청일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동학혁명은 성공했을까?
집강소라는 자치기구가 전국적으로 번져 신분차별이 없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을까?
물론 당시 대외상황이 조선에게 이 꿈같은 세상으로 가게 가만 놔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청일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조선은 반강제적으로 갑오개혁을 하게 되고 러시아 제국이 개입하기 전까지 일본 제국의 영향력에 넘어 갔다.
일본은 조선 정벌에 회의적인 소수 세력까지 메이지 유신 정권에 흡수되어 전체주의, 제국주의적 확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승전 후 청으로부터 받은 엄청난 배상금(청나라 2년치 국가예산)을 이용해 군비를 확충해 러일전쟁 승리의 기틀을 닦았다.
청나라 또한 일본에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해 국고가 탕진된다. 또 동아시아 종죽국이라는 자부심을 잃어 버리고 종이호랑이로 전락되어 멸망의 길로 접어 들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일본 세력을 점점 더 깊이 침투 시키게 된다.
동학혁명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농민들에 의한 혁명이었다. 혁명초반에는 농민군이 관군과 전투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해 조선조정과 협의 아래 농민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해 성공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 시대 상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혁명 후반에는 아직은 봉건주의 잔재에서 완전 벗어나지 못했던 지도자의 유교 성리학적 한계와 청일 외세 군대의 조선 진주로 실패하고 말았다.
아쉽고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1894년이 아니고 시간을 조금 더 앞 당겨 임오군란이나 갑신정변 당시 동학혁명이 일어났다면 외세 개입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동학혁명 지도자들의 성리학적 사고의 한계를 벗어나 반봉건, 반전제 기치를 내걸고 조선을 패망시키고 농민들을 위한 새로운 나라 건국에 동학농민군 모두가 나섰다면....
구한말 우리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상상만해도 가슴 뛰는 조선후기가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우리 역사정신에는 가장 큰 승리를 가져다 준 당시 대다수 백성들인 농민에 의한 자발적인 혁명이었다는 것 만큼은 잊지 말자!
동학혁명의 시작은 농민의 항쟁이 언제나 그랬듯이 탐관오리의 무자비한 착취에서 부터 시작 된다.
동학혁명 발생 이전에 조선조정은 1864년 동학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여 군문 효수하였다. 이후 동학도들은 매년 한성으로 상경하여 교조신원과 포교허용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다 1893년 초 흥선대원군은 동학도들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이에 민씨 정권은 흥선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 만 명을 한양으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역모를 도모하려 한다고 생각해 동학교도를 탄압하기 시작한다.
여기서도 흥선대윈군의 권력에 대한 노욕이 문제였다.
한편 1892년 전봉준이 접주로 있던 고부군에 조병갑이란 이가 군수로 취임해왔다. 조병갑은 풍양조씨 세도정치를 연 조두순의 서조카였다.
조병갑은 서자 출신이었지만 풍양조씨 가문덕택에 고부 군수로 취임한다. 조병갑은 군수로 취임 하자 마자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한다. 무고한 농민의 재물을 빼앗아 갈취한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농민들에게는 가차없이 형별을 가 하였다.
전라도 고부는 본디 비옥한 땅으로 저수지가 하나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억지로 저수지를 짓게 한다. 그 저수지들의 물값으로 농민들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물세를 책정하여 받아 냈다.
또 조병갑은 아버지의 선정비 또는 신도비를 세우는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천 냥의 돈을 거둬들이기도 했다.
조병갑은 그것도 부족하여 주민들에게 갖가지 어처구니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2만 냥이라는 엄청난 돈을 벌금으로 긁어 냈다.
게다가 대동미를 대신하여 돈을 거두고,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든답시고 쌀 700석을 착복하기도 한다.
조병갑은 조선의 탐관오리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악랄하게 돈을 긁어 모은다.
이렇게 긁어 모은 돈 일부를 조병갑은 중앙 조정에 뇌물로 바쳤다. 조병갑 같은 탐관오리들이 중앙 조정에 바치는 뇌물때문에 조선조정의 중앙관리들은 농민들의 원성을 뻔히 알면서도 탐관오리들의 불법행위를 모른 체 한다.
이러한 일은 고부 농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는 조병갑 개인적인 지나친 탐욕도 문제이기도 했지만 매관매직이 일상화 된 당시 조선조정의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고부 주민들은 1893년 11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군수에게 감세 탄원서를 제출한다. 하지만 조병갑은 진정서를 제출하려고 온 농민 대표를 붙잡아 하옥시키고 고문을 가하는 것으로 탄원서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이후 고부 농민 일부가 동학도들과 함께 한성으로 입경하여 탐관오리 처벌과 부패 정치인 파직, 민생 구휼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를 알게 된 조병갑은 마지막 발악을 하듯이 도리어 그들을 핍박하고 학정을 더 심하게 했다.
이에 고부 주민들을 대신하여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조병갑에 면세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한다. 그러나 조병갑은 전봉준 일가를 잡아들인다. 전봉준 아버지 전창혁은 조병갑에 잡혀가 심하게 매를 맞고 귀가한 지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죽는다.
후에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기 되는 녹두장군 전봉준은 이 당시 남접 소속 동학군 부대 지휘관들 중 한 사람이었다.
정확히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전봉준은 한 때 흥선대원군의 식객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동학군과 흥선대원군과의 밀계설이 계속 제기 되었다.
명성황후 측에게는 흥선대원군과 동학교도들의 밀약설은 동학교도를 탄압하는데 좋은 빌미가 된다.
이어 전봉준과 고부 농민들은 전라도관찰사에게도 탄원서를 보냈지만 관찰사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다.
이에 전봉준 등이 봉기를 준비하고 동학도들에게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30일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전근명령을 받음으로써 이 봉기는 취소되었다. 그러나 조병갑을 이어 고부군수로 발령 받은 자들이 계속 다른 곳으로 재발령되거나, 병으로 오지 못하게 되자 이듬해 1월 9일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다시 임명되었다.
학정에 대한 반발로 쫒겨나다시피 한 조병갑을 다시 고부로 발령 내는 것은 당시 조선 조정의 인사 조치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었는가와 그 난맥상을 적라하게 보여주는 조치였다. 이런 블랙 코메디가 없었다.
이처럼 탄원과 진정으로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농민들은 결국 힘으로 조병갑을 내 쫓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어 전봉준과 고부 일부농민들, 동학도들은 무기와 화약을 준비한다.
한편 동학 지도자들은 1893년 말부터 1894년 1월 초, 남접 내부에서도 거사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쉽게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남접의 최고 실력자인 손화중 역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고부 조병갑의 무자비한 학정을 직접 겪은 전봉준은
"이런 저런 부패가 있는데 어찌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어서 되겠습니까? 우리가 조선의 백성으로서 어차피 피해 다니면서 교를 형성하고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차에 이 기회에 나서서 정치를 바로 잡도록 해주는 것이 좋은 것 아니요. 취지가 맞다고 생각하면 다같이 동참해서 힘이 되어 주시고, 접주님이 주관을 해주시요"라고 손화중에게 부탁하였다.
그런데 손화중은 쉽게 승락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손화중은 "아직은 시기 상조입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더 있으면 자연히 그럴 때가 닥칠 수 있습니다. 그때를 맞춰서 해야지 지금 해서는 안됩니다"하고 전봉준을 설득하였다.
이처럼 동학농민혁명 직전 거사에 동학 내 강경파였던 남접 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더 큰 문제는 북접을 이끌던 최시형은 남접의 최고 지도자 중 한 명인 김개남이 '개남국왕설' 등이 시중에 떠돌고 전봉준일파가 흥선대원군과 결탁했다는 밀약설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후에 김개남은 전봉준의 '존왕양이'(왕을 지키고 서양세력을 몰아내자! )에 대해서 반대했고 조선을 패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며 전봉준과 각을 세운다.
북접의 동학 2대교주 최시형은 계속 조정과 협상론인 화전론(和戰論)만을 펼치고 있었다.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조병갑의 고부군수 재취임에 반발한 전봉준과 고부 농민 중심으로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새벽 1천여 명의 농민군은 이마에 흰 띠를 두르고 죽창과 농기구를 무기로 삼아 고부 말목장터에 집결하였다.
마침내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20명의 농민 지도부는 동학교도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다.
사발통문의 내용은 고부군수 조병갑을 처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주영까지 함락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는 바로 농민과 조선 조정과 대대적인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동학농민혁명의 횃불이 들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한다.
이제 동학혁명으로 본격적으로 들어 가 보자.
이어서 동학혁명4 ㅡ 혁명의 발발이 이어집니다.
아래 사진 중 첫번째 부터 순서대로
전봉준, 최시형, 김개남, 손화중 입니다.